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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1.5년 살기

낯선 곳으로 떠나다

저는 2018년 2월 23일 미국 시애틀의 University of Washington(UW)으로 떠났습니다. 좋은 연구자가 되려면 'cross cultural'한 경험이과 관점이 필요하다는 지도교수의 등쌀(?)에 못이긴 것이긴 했지만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안정적이고 익숙한 둥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실 저는 제가 왜 미국으로 가야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넓은 세상, 글로벌한 경험, 영어실력 향상 같은 것들이 따라오리라 기대는 했지만, 그게 꼭 그 시점에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인 입장에 가까웠죠. 아마도 그건 두려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의 심경이 담긴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tendtoyj.github.io/2018-02-23/d000-before-departure
떠나는 날, 공항 라운지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고마운 분들께 거취 업데이트를 드리는 이메일을 쓰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도착한 후에 받은 이메일 중에, 아직까지도 참으로 감사하고 또 기억에 남는, 그리고 결국 해주신 말이 사실이 되었던 신기한 이메일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안서 작업을 몇 번 같이 하며 나름대로 정을 쌓은(?) 융대원 이원종 교수님의 답장이었죠.
제가 보낸 이메일은 저는 1년간 미국에 갈 예정인데, 열심히 잘 하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수업 재밌었고 제안서 작업할 때 맛있는 밥 사주셔서 감사했다 뭐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구절 한구절이 따뜻하기도 하고 인사이트풀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마지막 문단이 제게는 참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힘든 시간에 종종 꺼내어보기도 했었죠.
다만, 짧은 기간이라 운이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니, 노력은 하되 특별히 되는 일이 없어도 좌절하지 마세요. 이런 경험은 10~20년은 지나야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서울을 떠나 도착한 미국에서는 외로운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변변한 포지션이나 프로그램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쨌든 그냥 UW iSchool에 던져져버렸기 때문에 알아서 연구기회도 찾고 친구도 만들고 살 곳도 찾고 놀기도 해야했고 정말 그냥 서바이벌이었죠. 심지어 전 유학생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정책에서 예외적이었고 그건 학교의 프로그램 참여, 거주, 세금, 비자 등 모든 부분을 혼자서 알아보고 해결해야 했습니다. 물론 박사과정쯤 되면 누군가가 아무것도 떠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뭔가 그때는 낯선 나라에 정말 내던져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도착하고 2-3개월이 지난 4월 말쯤 CHI가 캐나다에서 열려서, 북미에 온김에 지도교수님이 시애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시애틀에서 머무르고 돌아가시면서 선생님이 대책없이 보내 미안하다는 톡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또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는 기회이고, 마음먹기 나름이죠. 선생님 말대로 시애틀 독서실을 잘 이용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큰 타격은 없었습니다. 우리 선생님 대책없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문화 속에서

아무 기반도 없이, 유학생도 아닌 이상한 신분으로 미국의 대학원 연구 그룹에 끼는 건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저찌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 제 연구분야인 헬스케어와 관련있는 리서치 그룹 미팅에 참관하기로 했습니다. 몇 주간을 가만히 앉아 구경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려면, 나를 증명할 수밖에 없겠다는 것은 알았지만, 섣불리 나서기에는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으면서도, 어떤 이상한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 문화는 원래 그런거야. 여기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사람인거야, 병X같은 말을 하더라도 나서는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잖아.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문화. 그래,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제가 참석했던 리서치 그룹은 매주 돌아가면서 빈 slot을 만들어서 발표할 사람이 자율적으로 아젠다를 등록하는 형태였는데,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고 2주 후 슬롯에 이름을 채웠습니다. 별거 아닌 캐주얼한 세미나였지만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준비를 했습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발표를 했고, 다행히 아주 스윗한 리서치 그룹 친구들과 교수님들은 칭찬을 해주며 아주 귀중한 피드백을 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느낀 바가 있어 지도교수에게 이메일을 썼습니다.
그 이후로는 용기를 많이 얻었고, 친구들과 조금 더 가까워졌고,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연구를 본격적으로 UW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몸소 배운 Diversity

HCI를 하다보면 당연하게도 diversity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HCI 커뮤니티는 어쨌든 IT와 기술을 다룬다는 점, 서부가 베이스라는 점 등등 때문에 좀 더 리버럴한 경향이 있었죠. 2016년쯤 산호세에서 열린 CHI—HCI 학계의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있는, 누구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국제 탑 컨퍼런스—의 주제는 무려 CHI4Good이었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그해에 CHI에 합격한 논문의 주제는 교육, 아동, 접근성, 인종, 젠더 등 정말 diversity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마 어렴풋하게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30년을 한국에서 살면서 딱히 인종이나 젠더 문제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볼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이건 정말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남녀 뭐 이런 문제를 떠나서, 성별이 binary가 아닐 수 있다거나 pronoun이 큰 문제가 된다거나 하는 건 정말 한국 사회에서는 생각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사회의 스펙트럼 자체가 다르더군요.
연구를 진행하며 우리 연구팀에서는 오래된 설문지에서 Male, Female만 있던 객관식 문항을 좀 더 inclusive하게 바꾸기로 했습니다.
특히 시애틀이, 특히 UW이 이러한 다양성 수호의 첨병이라는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참여하던 리서치 그룹이 특히 diversity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것도요. UW에서 지내면서 they를 singular로 취급할 수 있다/없다 하는 논쟁에 참여해보고, 설문조사에서 성별을 주관식으로 묻는 것이 inclusive한 방법이라는 것을 배우고, 커밍아웃한 동료를 지지하고 안전하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교수님들은 대학원 admission을 줄 때, 그 학생이 diversity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프로그레스도 중요하지만, one's heart is in the right place에 있는지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그걸 길러내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살아보니 살갗의 끝에서 바로 이해가 되더군요. 제가 미국에 다녀와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diversity 교육 때문이라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아무도 저에게 와서 설교를 하거나 세미나를 한 건 아니지만요. 다양성의 문화라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끓여내고 고아내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여 키워나가는 것이고, 저는 그 속에서 아마도 제 안의 씨앗에 싹을 조금 틔워오게 된 것이겠죠.

남겨진 것들

1년 6개월간의 시간을 보내고 저는 비로소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배운 게 참 많지만 용기, 존중, 자신감과 같은 무형의 것들—어쩌면 증명하기도 힘든—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Mountain Rainier에 하이킹을 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사실 전 등산을 정말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이때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미국에서의 짧은 경험은 그만큼 저를 정말 많이 바꿔놓았습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요.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소감은, 시애틀을 떠나오던 바로 그 날 작성한 저의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당시의 느낌에 대해서 이보다 더 또렷한 기억과 감상은 없을테니까요.
9월 26일 목요일 아침, 나는 시애틀의 낡은 아파트 502호를 완전히 떠나왔다. 가구도, 물건도 없이,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의 텅 빈 아파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매니저의 지침을 따라 열쇠 세 개를 부엌 싱크대에 올려두고 문을 잠그고 아파트를 천천히 나섰다. 그리고 네 개의 짐가방, 소중한 기억과 경험들을 가지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다. 포용적인 iMed 그룹에서 가슴이 따뜻하며 훌륭한사람들과 연구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너무나도 멋진 완다 선생님에게 멘토링을 받으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병원에서 환자들과 의사들을 만나며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긍정 에너지로 가득찬 진하 선생님과 웃음으로 가득찬 프로젝트를 하고 논문을 쓸 수 있던 것도. 여행도 함께 하고 마음 속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생긴 것도.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살아보는’ 낯선 곳에서, 유학생도 포닥도 아닌 그 어디쯤 중간의 위치에서, 영어도 서투른 채로 나는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존중과 포용, 격려가 기본인 그룹에서 지낸다는 것은 나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너무나 멋진 두 멘토인 진하 선생님, 완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8개월 동안 내가 배운 것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잘 배운 것은 부정적인 것들과 싸워서 이겨내고 긍정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힘이었다.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괴롭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너무 괴로워 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못하는 것만큼 잘하는 것들도 많으니. 나는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걸 잘 하진 못하지만, 프로젝트 운영을 잘 하고, 계획을 잘 세우고, 슬라이드도 잘 만들고, 논문에 들어갈 그림과 테이블을 잘 만든다. 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원칙과 데드라인, 시간 약속을 잘 지킨다. 친구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며, 내가 속한 그룹이나 공동체가 나와 함께 성장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과도한 자만심도 독이겠으나 자기 자신을 너무 깎아내리는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음을 배웠다. 혹독한 깎아내림은 좋은 성과를 내기에는 최선의 전략일지 모르나 나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놀랍게도). 미국에 있으면 저녁 시간이 보장되기 때문에 꽤나 시간이 많아졌다. 가족이 없으면 그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저녁시간의 반절을 일하면서 보내도 생각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리하여 스스로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간단한 한 문장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잘 하는 일을 계속 잘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볼 것이다. 여전히 나는 박사과정 중이고, 변한 것은 없다.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지난 18개월의 경험이 나의 미래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꾸게 될 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하나만은 명확하다. 나는 이미 많은 부분 변했고, 내적으로 조금 더 단단해졌고,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 이 변화의 시작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신 Joon Lee 선생님에게 다시금 감사하며, UW에서 힘든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두 분의 소중한 멘토 Jin Ha Lee 선생님과 Wanda Pratt 선생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짧지만 길었던 나의 미국 생활 챕터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제는, 학위논문 챕터를 쓸 차례다.